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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바이처'의 아내는 빈민가 천사 ( 조선일보 ) 2017.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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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18-01-03 14:11 Hit1,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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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돈규 기자의 2사만루] 故이종욱 WHO사무총장 부인 가부라키 레이코 여사
페루 판자촌서 15년째 여성 자립 도와 一家賞 수상
"남편 점수는 99.9점… 0.1점은 기억에서 지웠죠"




수녀가 되고 싶었다. 스물일곱 살에 한센병(나병) 환자들이 모여 사는 경기 안양 나자로마을로 들어갔다. 가부라키 레이코(72) 여사는 45년 전 기억을 불러내며 "저를 필요로 하는 곳이라 생각했다"고 술회했다. 1972년 일본에서 한국으로 건너와 나자로마을에서 봉사를 시작했다.

인생은 여간해서 뜻대로 풀리지 않는다. 서울대 의대를 졸업한 동갑내기 청년이 1976년 그곳으로 의료봉사를 왔다. 이종욱(1945 ~2006). 나중에 '아시아의 슈바이처' '백신의 황제'로 불리고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이 될 남자였다. 그녀는 그의 청혼을 물리쳤다. "제가 몸이 자주 아팠고 한센병 환자들과 부대끼며 살았어요. 그 남자까지 불행해지면 어쩌나 불안했습니다." 이종욱은 물러서지 않았다. 마침내 부부가 되면서 아내는 자원봉사자의 삶을 거두고 남편 뒷바라지를 시작했다.

가부라키 여사가 지난 2일 일가재단(이사장 손봉호)이 수여하는 제27회 일가상(一家賞·사회공익부문)을 받았다. 지구 반대편 페루 빈민촌 카라바이유에서 15년 동안 여성들에게 뜨개질을 가르치고 생산품을 판매하며 자립을 도운 공로다. 키 150㎝쯤 되려나. 남편 나라에 다시 온 그녀는 작지만 굳세 보였다. 비행기가 인천공항에 착륙할 때 어떤 기분이었는지 묻자 "뭔가 대단한 일이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고 답했다.

페루 카라바이유 판자촌의 자원봉사자 가부라키 레이코 여사가 지난달 30일페루 카라바이유 판자촌의 자원봉사자 가부라키 레이코 여사가 지난달 30일 서울 한국국제보건의료재단 ‘이종욱 기념 전시실’에 서 있다. 뒤로 이종욱 전 WHO 사무총장이 2003년 아프리카 앙골라를 방문했을 때 사진을 합성했다. 가부라키 여사는 “남편은 먼저 떠났지만 여전히 내 삶의 가장 큰 후원자”라고 했다. / 김지호 기자·한국국제보건의료재단



나자로마을의 일본인 봉사자

페루 리마에서 인천공항까지는 비행기를 갈아타고 꼬박 24시간이 걸린다. 2년 전에도 다녀갔는데 이번엔 뭐가 그토록 특별할까. 가부라키 여사는 "높은 분들 만나고 큰 상도 받아 소감을 밝혀야 하는데 남편은 숱하게 겪었겠지만 내겐 어려운 일"이라며 "혼자라서 더…"라고 했다.

―한국에서 결혼하고 남편 따라 미국 하와이, 사모아, 피지, 필리핀, 스위스를 거쳐 지금은 페루에서 살고 있는데 이곳에 깃든 추억이 많나요?

"나자로마을에서 일할 땐 그날그날 아주 열심히 살았어요. 4년쯤 지나자 '결혼하자'는 사람이 나타났고 명동성당에서 혼인을 하고 아들도 낳았지요. 일생 하나밖에 없는 경험들이잖아요. 삶에서 중요한 구간을 한국에서 보낸 것 같아요."

―우리말 참 잘하시네요.

"독학했어요. 일본 성경책과 한국 성경책을 대조하며 읽은 게 도움이 됐지요. 나자로마을에서 설거지하면서도 함께 일하는 분들께 '이 단어는 무슨 뜻인가요?' 묻곤 했어요."

―KBS 외국인 장기자랑에서 1등을 했었다고요.

"이 노래로요. (흥얼거리며) 제목이 '바닷가의 추억'이에요. 가수는 누군지 기억 안 나는데, 제가 문학도 좋아하지만 기타를 치거든요. 한국 살 때 외국인 장기자랑에 한복 차림으로 나가 기타 치며 그 노랠 불렀는데 1등 상을 받아 기분이 좋았지요."

―처음 한국에 왔을 때 사연이 궁금합니다.

"일본 도쿄에서 성당에 다녔어요. 한국에서 온 신부님이 나자로마을 이야기를 들려주셨어요. 환경이 열악하고 의료진도 부족한데 '영어 할 줄 아는 자원봉사자가 필요하다' 하셨지요(그녀는 영문학을 전공했다). 간단히 결정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는데,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 줄도 모르면서 거기 가서 돕고 싶어진 거예요."

―행동으로 옮길 때 가족도 응원했나요.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셨고 아버지 혼자 삼남매를 키웠는데 제가 한국 간다고 하니 무척 서운하셨나 봐요. 떠나는 날 인사 드리니 '그래? 넌 내 딸이 아니니까' 하셨어요."

―두렵지 않았나요? 한센병은 전염병이고 환자를 돌보려면 각오가 필요한데.

"대학 시절 고아원에서 일주일에 두 번 아이들 숙제 도와주는 봉사를 했어요. 그 동네에서 한 정거장 가면 도쿄에 하나뿐인 나환자 병원이 있었고요. 버스 탈 때 손잡이 만지는 것도 꺼림칙했습니다. 옮을까 봐 무서웠죠. 그런데 나자로마을에서는 그런 공포가 없었어요. 이상한 일이죠. 제 마음에 굉장히 큰 변화가 일어났구나, 생각했어요."

―수녀가 될 작정이었다고요?

"(웃으며) 가톨릭 신자로서 욕심이 있었어요. 수녀원에서 강의하는 교수가 되고 싶었습니다."

―남편을 처음 만난 날 기억하시나요?

"1976년 2월 9일이에요. 젊고 잘생긴 청년이 의료봉사를 하고 싶다며 찾아왔지요. 그 사람이 환자 상처를 소독해주고 붕대 갈아주는 모습을 지켜봤어요. 진료 끝나면 제가 있는 사무실로 와 '어떤 음악 좋아하세요?' 묻기도 했죠. 일주일에 하루 이틀 오다가 나중엔 매일 다녀갔어요.",


1970년대 말 의사 이종욱과 가부라키 레이코의 신혼 시절.1970년대 말 의사 이종욱과 가부라키 레이코의 신혼 시절 / 가부라키 레이코 제공

"이 세상에 나 혼자가 아니구나”

몇 달 뒤 이종욱은 청혼한다. 그를 밀쳐냈다 받아들이기까지 과정을 몇 차례 캐묻자 가부라키 여사는 “왜 그것까지 알아야 하죠?”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인생을 기록하려면 구멍이 없어야죠.

“수녀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강했어요. 그때 몸이 자주 아팠고요. 한센병 환자들과 5년 가까이 지냈는데 저한테 면역(免疫)이 있을까, 의심스러웠죠. 의사는 ‘괜찮을 거다’ 했지만 ‘위험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였어요. 제가 결혼하면 그이까지 피해를 보잖아요. 또 당시에 나병 환자는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였어요. 의사 아내가 그렇다는 게 알려지면 병원에 누가 오겠어요. 그런데 설득당했지요.”

―뭐라 하던가요?

“그이가 딱 한 마디 했어요. ‘아프면 내가 고쳐줄게.’ 촌철살인 같달까, 그 말에 감동했어요.”

―어떤 기분이었나요.

“이 세상에 난 혼자가 아니구나.”

―어디가 얼마나 아팠나요? 그럼 봉사고 뭐고 그저 집에 가고 싶을 텐데요.

“밥은커녕 물도 못 마실 만큼요. 몸은 바짝 마르고 우울증이 겹쳤죠. 일본에 잠깐 돌아갔을 땐 아버지가 저를 데리고 다니며 스테이크·스시·튀김을 먹였어요.”

―화해했군요.

“수녀가 되겠다던 딸이 결혼한다니 좋아하셨죠. 한·일 관계가 나빴는데 의학 공부한 똑똑한 사위라며 반기셨어요. 결혼식 날 서울로 모셨지요. 신혼여행 안 가고 아버지가 좋아할 만한 곳을 이곳저곳 보여 드렸어요.”

―첫사랑이었나요?

“저한테는요. 서울대 의대 졸업하면 병원장 딸이다 뭐다 중매가 줄을 섰겠지요. 신혼 때 시어머님이 남편한테 ‘그 아가씨 있잖아, 누구랑 결혼했다더라’는 얘길 가끔 하셨어요. 남편은 듣기 싫은지 돌아눕거나 일 핑계 대고 병원으로 나갔지요(웃음).”

―결혼하면 배우자에 실망하곤 하는데 ‘의사 이종욱’과 ‘남편 이종욱’은 달랐나요?

“아뇨. 양쪽 다 히어로(hero·영웅)였어요.”

―양말을 뒤집어 벗어놓는다거나, 얼룩 한 점 없는 분이었다고요?

“100점 만점에 99.9점이랄까요. 좋은 남편, 좋은 아버지였고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어요. 단점이 뭐였는지는 기억에서 지웠어요(웃음).”

―이종욱 박사는 1981년 남태평양 사모아의 작은 병원에서 일하며 의료봉사를 했습니다. 한센병 환자들을 열정적으로 돌봐 ‘아시아의 슈바이처’로 불렸고 1983년에 WHO 서태평양 지역사무처 한센병 자문관으로 발탁됐지요.

“그 시절 남편은 병원 일로, 저는 육아로 바빴어요. 집 밖은 ‘자이언트 아프리칸 스네일’이라는 달팽이 천지였어요. 만지면 두통과 구토가 생기고 심하면 죽기도 했어요.”

―생전에 집 한 채 소유하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높은 자리에 있어도 늘 낮아지려고 노력하신 것 같습니다.

“차분하고 일을 잘했죠. 하지만 야심이 없진 않았습니다. WHO가 남편의 재능을 발견해준 것도 있겠지만 하나씩 단계를 밟으며 올라갔지요. ‘가족이 짐 될 수도 있겠다’ 생각한 적도 있어요.”


가부라키(왼쪽) 여사가 페루 빈민촌 카라바이유에 만든 공방에서 현지 여성들에게 뜨개질을 가르치는 모습이다.가부라키(왼쪽) 여사가 페루 빈민촌 카라바이유에 만든 공방에서 현지 여성들에게 뜨개질을 가르치는 모습이다. / 가부라키 레이코 제공

다시 자원봉사자의 길로

이종욱은 WHO 본부 예방백신국장이었던 1995년 소아마비 발생률을 세계 인구 1만명당 1명 이하로 낮춰 ‘백신의 황제’ 칭호를 얻었다. 2003년엔 WHO 사무총장으로 선출됐다. 한국인 첫 유엔기구 수장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그는 청빈했다. “가난한 나라가 낸 분담금도 있는데 호강할 수 없다”며 1500㏄ 하이브리드 차를 탔고 비행기도 1등석을 사양했다. 1년에 150일은 ‘출장 중’이었다.

―야심가 남편과 살긴 쉽지 않았을 텐데요.

“바깥에 신경 쓸 일이 워낙 많았어요. 아들도 미국에서 대학을 다녀 스위스 제네바 집에 저 혼자 있곤 했지요. 외로웠어요.”

―이종욱 총장이 ‘항상 행동하는 사람(Man of Action)’으로 불린 거 아세요? ‘안 된다고 생각하면 수많은 이유가 있고 그럴 듯한 핑계가 생기기 때문에, 옳다고 생각하는 일이라면 일단 밀고 나가야 해’라고 말씀했지요.

“몰랐어요. 듣고 보니 결혼도 속전속결, 그런 식으로 했네요(웃음).”

―질병 퇴치의 최전선에서 싸웠지만 정작 자신은 너무 일찍 떠나셨지요(이종욱 총장은 2006년 5월 제네바 사무실에서 뇌졸중으로 쓰러져 별세했다).

“가끔 머리가 아프고 피곤하다 했지만 건강한 사람이었어요. 언젠가 최고혈압이 138로 나왔는데 저를 보곤 ‘거봐, 괜찮지?’ 했어요. 의사인 남편이 그러니 믿었지요.”

―내조만 하다 2002년 페루로 가 다시 봉사자의 삶을 살고 있는데 계기가 있었나요?

“제가 나쁜 사람이니까 떠났죠(웃음). 제네바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앉아 있는 데 지쳤어요. 고아원이나 나자로마을에서 일하며 보람을 느끼던 때를 떠올리니 더 싫증이 났습니다. ‘아프리카나 동티모르 가서 난민을 돕고 싶다’ 했더니 위험하다며 남편이 막았어요. 그러다 페루에서 결핵환자를 돕는 단체(소시어스 엔 살루)를 소개해줬지요.”

―처음엔 영어를 가르쳤다고 들었습니다.

“네. 그런데 전화받고 나갔다 들어오는 사람이 너무 많아 수업이 엉망이 됐어요. 포기하고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남편 입장이 난처해질 것 같아 리마 북쪽의 빈민촌 카라바이유로 들어갔습니다. ‘무헤레스 우니다스(Mujeres Unidas)’라는 공방을 열었습니다.”

―공방 이름은 무슨 뜻인지요.

“‘여성 연대’예요. 페루에서는 여성 홀로 자녀를 키우는 가구가 많아요. 저는 가난한 여성들에게 뜨개질을 가르치고 알파카(낙타과의 포유류) 털로 스카프·모자·스웨터 등을 만들어 판매합니다. 교육하고 재료 구입하고 판로를 만드는 일이 제 몫이죠. 한국·일본·스위스에서 바자를 열어 팔아요.”

―재료비며 운영비는 어떻게 마련했나요?

“처음엔 남편이 남몰래 사비로 대줬어요. 돌아가신 다음에는 국제한인간호재단, 이종욱글로벌의학센터, 한국국제보건의료재단, 한국국제협력단의 지원이 큰 힘이 됐습니다. 남편이 없으니 저도 독립심이 생겨서 열심히 일했지요.”

“가장 큰 후원자는 여전히 남편”


가부라키 여사가 자원봉사하는 빈민촌가부라키 여사가 자원봉사하는 빈민촌



가부라키 여사는 일가상 시상식에서 “제가 이 상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감히 ‘네’라고 답하고 싶다”며 “페루의 공방 여성과 그들의 부모·자녀에게 의료 지원이 절실하지만 우리 수익으론 엄두를 못 냈는데, 이 상금(1000만원)으로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아 기쁘다”고 말했다.

―자원봉사자의 길을 돌아보면 어떤가요.

“매우 어려운 삶이었고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었지요. 페루에서는 가능한 일이라서 한 게 아녜요. 해야 했기에 제안하고 설득하며 변화를 이끌어냈습니다.”

―2006년 이 총장 대신 파라다이스상(특별공로부문)을 받았을 때 “남편은 내게 집 같은 존재였다”고 하셨지요. 그럼 남편을 떠나보내며 집을 잃으신 건가요.

“스위스에서처럼 여전히 월세로 살고 있지만 이젠 페루 카라바이유가 내 집 같아요. 스페인어도 배웠고요.”

―공방의 최대 후원자는 누구인가요.

“이종욱 총장이죠. 남편이 세상 떠날 때 우리 공방으로서는 최대 후원자를 잃은 거였어요. 그런데 ‘이종욱 총장의 아내’라는 것 때문에 지금까지도 저희 공방에 기부해주시는 한국분이 많아요. 그럴 때마다 ‘남편이 도와주고 있구나’ 생각해요.

―지금 공방에는 현지 여성 몇 분이 일하나요? 페루에서 ‘카라바이유의 천사’라고 불리신다던데요.

“11명요. 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돕고 싶었어요. 그들에게 사랑을 배웁니다. 천사는 제가 아니라 이종욱 총장이지요.”

―요즘 가장 큰 근심은 뭔가요.

“당장은 건강한데 저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물건 팔 데가 없어질까 걱정이에요. (눈물을 글썽이며) 지금까진 남편이 도와주고 있어요. 제가 어린애 같죠? 그래도 괜찮아요. 남편이 너무 멀리 가버리니까 미안했는지 가깝게 도울 분들을 보내주고 있어요.”

―지치고 외로울 땐 어떻게 견디나요.

“남편 사진 보면서 주문을 욉니다. ‘아나타(あなた·당신) 도와주세요, 아나타가 필요해요.’ 평소에 남편을 그렇게 불렀어요.”

―인생에서 후회스러운 일도 있는지요.

“2002~06년엔 1년의 반은 페루, 나머지 반은 스위스에서 살았어요. 그렇게 남편과 떨어져 있던 탓에 돌아가신 것 아닌가 생각 들 때마다 사무치게 눈물이 나요. 후회하고 또 후회하죠.”

―보통 사람은 좋은 직업, 좋은 집, 좋은 차를 소유하는 데 집착합니다. 물욕을 초월한 분 같은데 행복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초월한 게 아니라 이것밖에 없어요. 사람과 사람이 같은 마음으로 일하고 서로 이해하는 게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부는 닮은꼴이었다. ‘행동하는 사람’은 이종욱 총장뿐만 아니라 가부라키 여사를 가리키는 말처럼 들렸다. 그녀는 조금 큰 여행가방만 한 체구였다. 팔은 작은 나뭇가지처럼 가늘었다. ‘인생은 빌린 것’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가부라키 여사가 옆에 있는 남편의 흉상을 쓰다듬으며 혼잣말로 한참 중얼거렸다. 뭐라 속삭였는지 물었다.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왜 안 움직여요? 왜 안 움직여요?’라고 했어요.”


 


기사주소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9/22/201709220192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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